본문 바로가기

Review/독서리뷰

데미안, 헤르만 헤세

반응형


2017. 4. 16. 18:38


이 책을 거의 3개월간에 거쳐서 읽었다.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왜이리 안읽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 그 여운이 길었다. 힘들게 읽었던 만큼 그 여운은 길었다. 자신과의 싸움이 매우 힘들고 좁고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다 읽고 나서 이게 뭐지(?) 했는데 다음과 같은 해설을 통해서 그나마 작가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  

-----------------------------------------------------------------------------------

줄거리 


독일 문학의 선구적 작품 <데미안>


<데미안>은 헤르만헤세가 1919년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소설이다. 당시 문단에서 대문호로 불리던 헤세는 작가로서 자신의 소설이 작품성만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자 했다. 

 그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1919년에 출간된 <데미안>은 뜨거운 반응을 불러인으켰다. 폰타네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출판계에서는 '에밀 싱클레어'라는 익명의 작가의 존재가 관심의 중심이었다. 

 소설가 토머스 만이 '데미안'을 출간한 출판사에 '에밀 싱클레어'가 누구인지 알려달라고 간청한 일례도 있었다. 결국, 평론간 코로디가 <데미안> 문체를 통해, 이 작품이 헤르만 헤세의 것이라고 밝혀내었고,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의 이름으로 다시 발간되었다. <데미안>은 세계대전 이후 황폐해진 땅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무조건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을 희생하고 파괴해야 했던 현실과 자아의 관계를 친절하고도 치밀하게 안내한다. 개인주의적이고, 철학적인 사유가 관슴화된 독인에서, 개인의 내면을 면밀히 탐구하지 않고서는 전쟁이라는 현실을 똑바로 이야기할 수 없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제1차,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독인 문학에서 '전쟁'과 '개인'의 관계를 치밀하게 제시한 선구적인 작품이다.


두 세계

 소설의 화자는 중년의 '에밀 싱클레어'다. 중년의 나이에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소설의 화자는 헤르만 헤세와 많이 닮아 있다. 당시 중년의 나이였던 헤르만 헤세는 세계대전에서 체험한 인간의 잔임함,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 질서의 혼란을 자기 내면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2차적인 자아의 변화를 소설로 집필한 것이 <데미안>이었다. 유년 시절 '에밀 싱클레어'의 인물 배경 역시 헤르만 헤세와 비슷하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신앙적인 삶을 사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으며, 일반 공립학교가 아닌 라틴어 학교를 다닌다. 

 하지만 화목한 가정 속에서 신앙적인 삶을 살고 있는 싱클레어의 밝은 세계는 프란츠 크로머를 만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저 우쭐대기 위해서 시작했던 거짓말을 발단으로,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에세 약점을 잡힌다. 단 하나의 잘못을 프란츠 크로머에게 들켰을 뿐인데, 인생이 송두리째 지배당하기 시작한다. 싱클레어의 자아는 항상 가까이 있었지만 직접 경험개 보지는 못했던 어두운 세계로 빠져든다. 꼬마 싱클레어를 이루는 세계인, 부모님도, 누나들도, 신도, 학교도 어둠의 세계에서는 아무 효력이 없었다. 온전한 자기 자신만의 문제를 싱클레어는 처음 갖게 된다. 


카인

 크로머와의 관계는 완벽하게 혼자서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만, 싱클레어는 아무런 해답을 찾지 못하고 크로머에게 끌려다닐 뿐이었다. 어둠의 세계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올 방법을 찾지 못해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때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성서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며 싱클레어와 논쟁을 편친다.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이 사실은 영웅이라는 데미안의 견해에 싱클레어는 반작했다. 타인의 생각에 처음으로 의구심을 갖는다. 싱클레어에게는 작은 시작이었지만,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자신의 내면에 끝없는 의문으로 남는다. 고요하던 싱클레어의 내면에 하나의 질문이 던져진 것이다. 

 모든 진실과 진리는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수 있다는 데미안의 주장에 싱클레어는 자신도 모르게 비판적인 사고와 자아의 새싹을 틔우기 시작하며, 프란츠 크로머와 맞설 결심을 한다. 스스로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단초를 발견한 것이다.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데미안은 달변가나 지식인처럼 '말뿐인' 자아 성장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에 직접적으로 부딫치며, 책임의식을 갖고 삶을 추구할 수 있는 내면의 성장을 중시한다. 데미안은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에 대한 이야기로 싱클레어와 심각한 논쟁을 벌인다. 

 악마의 세계에서 살아온 두 도둑이 죽기 직전에 한 명은 회개했고, 한 명은 회개하지 않았다. 기존의 상식대로라면 당연히 회개한 도둑이 칭찬받아야 했지만 데미안은 생각이 달랐다. 악마의 세계에서 살아온 자가 천사의 사당발림에 넘어간 것은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악마의 세계에서 벌을 받는 쪽을 택한 도둑이 더 나은 인간이라고 말이다. 

 이 논쟁을 단순히 비판적 사고를 키우기 위해 사고의 틀을 깨고자 했던 소재일 수있다. 하지만 자아가 성장하는 데에는 말뿐인 자아 성장이 아닌 자신의 선택을 책임질 수 있는 의무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책임 의식은 마지막 '종말의 시작'에서 전쟁에 참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책임 의식을 설명하는 단초가 된다. 현실에서 자기 존재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자아의 성장 정도와 상관없이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의무다. 


베아트리체

 소년기의 싱클레어는 고독과 방황속에서 헤매며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년 시절과는 달리, 그 늪에서 스스로 헤어 나오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것이 바로 베아트리체였다. 베아트리체는 싱클레어의 자아가 추구하는 이서적이고, 가족적이고, 친밀하면서도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둘 다 아우를 수있는 첫 번째 표적이 된다. 

 자신의 내면에서 이 표적을 발견하기 위해 싱클레어는 끊임없는 좌절과 방황과 탐구를 반복한다. 그 질기고 간절한 노력에 첫 번째 표적 베아트리체가 완성된 것이다. 싱클레어가 끊임없이 추구한 질문에 자아가 첫 번째 답을 제시한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소년기를 지나 어른으로 향해가는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의 표적 다음에 어린 시절 고향집 현관 위에 있던 문장에 새겨진 새를 그린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이 두번째 발견을 싱클레어는 무작정 데미안에게 전송한다. 그리고 데미안에게서 답이 왔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_본문 중에서 

 알에서 깨어 나오려고 애쓰는 싱클레어의 자아를 향한 길잡이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야곱의 싸움

 길잡이를 찾아낸 싱클레어는 본격적으로 아브락사스라는 존재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즉, 싱클레어는 좀 더 면밀하게 자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이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를 구성하는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 요인은 무엇인지. 자아를 탐구하며 답답해하는 싱클레어의 고민들은 아브락사스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많이 닮아 있다. 

 싱클레어의 자아에 중요한 두 세계는 내면의 새계와 외부의 세계이다. 아브락사스 역시,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를 모두 포괄하는 존재다. 싱클레어가 곧 아브락사스이며, 아브락사스가 곧 싱클레어이다. 자신의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완전하게 인식하기 시작하는 지점인 것이다. 


에바부인

싱클레어의 자아는 아브락사스라는 길잡이를 통해 어느 정도 완전한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싱클레어 본인이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그 와중에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재회하고 그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자신의 내면에서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던 형상을 드디어 찾은 것이다. 베아트리체와 아브락사스의 단계를 거쳐 드디어 찾은 에바부인을 보며 싱클레어는 데미안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다. 

"무엇을 '우연히' 발견되고 '우연히 시작되는 것은 없다. 사람이 무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며 그것은 이루어진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얽매 오더라도,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집중해야 한다. 우리들 마음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마음 속에는 모든 것을 원하고, 우리들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해내는 누군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히야 한다."_ 본문 중에서 


종말의 시작

싱클레어는 이렇게 훌륭하게 자아를 성장시키는 듯 했다. 하지만 싱클레어를 둘러싼 세계는 그렇게 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내면적인 물음도, 답도 상관없이 외부 세계는 싱클레어의 내면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전쟁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는다. 

 모든 개인들이 내면적인 자아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접점에는 반드시 외부 세계와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 내면의 생각과는 다르게 피해갈 수 없는 전쟁의 과정도 세계를 다시 재창조해내는 과정 중 하나일 수 있다. 여기에 참여하는 수많은 병사들은 그동안 우리가 무시해 왔던 성숙되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소평가였다. 떠맡겨지긴 했지만 공동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이들은 전쟁터로 왔던 것이다. 우리가 피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준비했다. 하더라도 삶은 우리에게 사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를 준다. 싱클레어의 자아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병사들고, 에바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자아는 이렇게 어느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제를 제시하며 우리 삶을 흔들어 놓는다. 지식힌 헤르만 헤세의 시선으로는 그 어떤 탐구도 전쟁의 잔인함과 쾌락과 혼란함을 설명할 수 없었다. 현실에 분명하게 존재했지만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그것은 현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반아들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내면에서 이해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현실의 있는 그대로를 직시해야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_본문 중에서


새가 알에서 나와 새로운 세계를 창조 하듯이, 우리도 세계로 통하는 자신의 껍질을 부수는 데 사력을 다해야 한다. 자신과 싸워 가는 길은 좁고 힘들지만, 그 길에 집중하며 인생의 돛대를 세워야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다.

 한 개인이 독립적으로 성장하려면 우리는 의존하고 있던 많은 것들에서 독립해야 한다. 따뜻한 가족, 부모님의 품, 도덕적인 신, 의지가 되는 친구, 기대고 싶은 사랑, 추구하고싶은 이상향 등. 하지만 이 많은 것들을 떠나 홀로 서려면 자아의 내면적인 탐구와 비판적인 사고뿐 만 아니라 다른 것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전쟁처럼 자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외부적 요소들은 내면적인 자아의 이야기로는 설명할 수 없다. 지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인식하려면 자아가 끊임없이 낡은 세계의 껍질을 벗어 내고 새로 태어나는 방법밖에 없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삶의 순간마다 주어지는 고민들을 애써 외면 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 스스로의 고민에 치열하게 답을 찾을 필요가 있다. 내 안의 자아가 어떻게 해야 껍질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는지 우리는 훈련이 부족하다. 그래서 밝은 세계에 조금만 위협이 가해져도 금방 죽을 것처럼 공포에 질린다. 하지만 이 공포는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듯이, 사력을 다해 껍질을 부수고자 한다면 극복할 수 있다. 겁에 질려 평생 자아를 세상 밖으로 꺼내 보지도 못하느냐, 당당히 세계와 마주하느냐는 우리들 선택에 달려있다. 그 선택에 <데미안>이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수많은 '에밀 싱클레어'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


괴물의 아이
국내도서
저자 : 호소다 마모루 / 이은주역
출판 : 대원씨아이 2015.11.25
상세보기



토요일 오전에 티비에서 해주길래 봤다. 참 재밌는 영화당. 초반엔 영상미가 돋보였는데 후반으로와서 렌이 지로마루??얘랑싸울 때 인간의 자아에 대한 불완성을 가슴의 구멍으로 표현하는 것이 인상깊었다. 동물과 다르게 우리 인간들은 되든 안되든 자아를 완성해야 한다. 나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나름대로 결정했을 때 더욱 보람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반응형
LIST